포뮬러원(F1) 월드 챔피언십이 시작된 지 70년이 넘었다. 이 기간 챔피언에 도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레이스를 펼친 선수들은 772명에 달한다.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그동안 F1을 거쳐 간 사람들은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가운데 어떤 이는 전설이 됐고 또 다른 이는 이렇다 할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모터프레스는 기획연재 ‘F1 그사람’을 통해 아름다운 도전을 펼친 이들의 발자취를 집중 조명한다. [편집자주]

절대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낸 사람을 흔히 '불사조'라고 한다. 주로 스포츠 분야에서 사고나 슬럼프를 딛고 일어선 사람에게 이런 별명이 붙곤 한다.

포뮬러 원(F1)에도 불사조라 불리는 인물이 있다. 죽음의 위기마저 이겨낸, 화염 속에서 살아 돌아와 불멸의 업적을 이룩한 전설. 니키 라우다의 이야기다.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니키 라우다는 17살 때인 1966년 독일 그랑프리를 보고 F1 드라이버의 꿈을 꾸게 됐다. 하지만 가족들은 가업을 이으라며 거세게 반대했고, 이 때문에 그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식구들과 의절까지 해가며 레이스에 출전했다고 한다. F2 진출 때는 자금 조달을 위해 자신의 생명 보험을 담보로 대출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내구 레이스와 투어링카, 스포츠카 대회 등 다양한 종목의 경주를 거친 뒤 3년 만에 F1 무대를 밟았다. 초창기 성적이 그리 좋진 못했지만 높은 잠재력을 보였고, 덕분에 엔초 페라리의 눈에 들어 데뷔 4년차인 1974년부터 페라리 드라이버로 활동하게 됐다.

엔초 페라리와 니키 라우다
엔초 페라리와 니키 라우다

라우다는 이적 후 첫 경기부터 2위에 오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4라운드 스페인에선 생애 첫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고, 8라운드 네덜란드부터는 6경기 연속 폴 포지션을 기록하기도 했다.

1975시즌엔 초반 잠깐 부진하는 듯했지만 금세 실력을 회복했고, 압도적인 활약으로 커리어 최초의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 페라리도 1964년 이후 11년 만에 드라이버·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모두 휩쓸었다.

F1 월드 챔피언에 오른 니키 라우다
F1 월드 챔피언에 오른 니키 라우다

덕분에 그는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고, 그토록 레이스 출전을 반대하던 가족들도 이때부터 라우다를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라우다 본인은 무덤덤했고, 챔피언 트로피도 동네 세차장의 평생 무료 세차권과 교환해버렸다.

1976년에도 라우다는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초반 6경기 중 4번을 우승하고, 나머지 2개 레이스에서도 2위에 오르는 등 뛰어난 실력을 유감 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10라운드 독일 그랑프리에서 그의 인생 최대 최악의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1976년 독일 그랑프리에서 발생한 니키 라우다의 사고 장면
1976년 독일 그랑프리에서 발생한 니키 라우다의 사고 장면

레이스 장소인 뉘르부르크링은 매우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 상황으로, 라우다는 대회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기는 그대로 진행됐고, 결국 그는 블라인드 코너인 베르그베르크를 지나던 중 미끄러지며 펜스를 들이받고 말았다.

충돌 후 튕겨나온 그의 레이스카는 불길에 휩싸였고, 뒤따라오던 브렛 룽거의 차량과 다시 한번 부딪혔다. 이 사고로 라우다는 극심한 전신 화상과 골절, 유독가스로 인한 폐손상을 입었다.

당시 그의 부상은 가톨릭 사제가 임종 의식을 진행할 정도로 심각했다.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경이로운 속도로 회복하더니 한 달 반 만에 붕대를 감은 채로 서킷에 복귀했다.

사고 후 6주 만에 서킷으로 돌아온 니키 라우다
사고 후 6주 만에 서킷으로 돌아온 니키 라우다

돌아온 라우다는 심한 화상으로 오른쪽 귀가 잘려나가고 눈썹이 타버리는 등 매우 처참한 모습이었다. 경기 후엔 혼자서 헬멧도 벗지 못했고, 붕대는 피투성이가 돼있었다. 그럼에도 13라운드 이탈리아 그랑프리를 4위로 마무리하며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니키 라우다와 그의 라이벌 제임스 헌트
니키 라우다와 그의 라이벌 제임스 헌트

하지만 최종전인 일본 그랑프리에서 폭우가 내리자 그는 안전 문제 때문에 경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해 월드 챔피언 자리는 단 1점 차이로 라이벌 제임스 헌트가 가져가게 됐다. 또한 눈 앞에서 챔피언을 내준 것으로 엔초 페라리와의 관계도 나빠지게 됐다고 한다.

이듬해 라우다는 다시 한번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시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월드 챔피언을 조기 확정 지었다. 그러나 페라리가 라우다와 사이가 좋지 않은 카를로스 로이테만을 영입하는 등 여러 문제들이 계속됐고 결국 그는 브라밤으로 이적했다.

라우다는 브라밤에서 두 시즌을 보낸 뒤 '더는 바보같이 빙글빙글 돌고 싶지 않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딴 항공사를 차려 대표겸 조종사로 활동했다.

1984년 통산 3회 챔피언에 오른 니키 라우다
1984년 통산 3회 챔피언에 오른 니키 라우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항공사가 자금난에 시달리던 중 맥라렌이 거액을 제시하며 영입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결국 그는 1982년 F1으로 돌아왔다.

비록 전성기 때만큼의 강력함을 보이진 못했지만, 2회 챔피언의 클래스는 여전했다. 복귀 첫해를 종합 5위로 마무리하더니, 3년차인 1984년엔 팀메이트인 알랭 프로스트를 단 0.5점 차이로 꺾으며 통산 3번째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 페라리와 맥라렌에서 모두 챔피언에 올라본 것은 F1 역사상 라우다가 유일하다.

노년의 니키 라우다와 루이스 해밀턴
노년의 니키 라우다와 루이스 해밀턴

이후 그는 1985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완전히 마감했다. 2차 은퇴 후엔 항공사 경영과 함께 페라리 어드바이저, 재규어 감독을 맡는 등 계속해서 F1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2012년부터는 메르세데스의 비상임 의장으로 활동하며 2019년 5월 70세 나이로 별세하기 전까지 꾸준히 F1에 모습을 드러냈다.

니키 라우다가 보여준 불굴의 투지와 눈부신 활약, 라이벌 제임스 헌트와의 치열한 경쟁 관계는 2013년 '러시 : 더 라이벌'이란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또한 그의 설득으로 메르세데스에 합류한 루이스 해밀턴은 이후 7회 챔피언이라는 불멸의 업적을 달성, 라우다를 이어 F1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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