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5월 13일 영국 그랑프리 개막과 동시에 포뮬러 원(F1) 월드 챔피언십의 찬란한 역사가 시작됐다. 80여 년이 지난 현재 F1은 자타공인 전 세계 최고의 모터스포츠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해도 손색없을 만한 각양각색의 시나리오가 자연스레 쓰여졌다. 문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잊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기획했다. F1 사건파일. 누군가는 기억해야 할 순간을 기록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넘버 17. 포뮬러 원(F1)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숫자다. 2015년 7월 17일 세상을 떠난 쥴스 비앙키의 번호로 이제는 그 누구도 17번을 달고 트랙 위를 달릴 수 없다. 그의 죽음을 기리면서 영구 결번된 번호이기 때문이다. 혜성같이 등장해 빛나는 재능으로 차세대 페라리 드라이버로 꼽히던 프랑스 국적의 유망주.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비앙키의 안타까운 마지막 순간을 되돌아보려 한다. 

쥴스 비앙키.
쥴스 비앙키.

179cm의 이상적인 키에 말끔한 외모 그리고 근사한 불어 발음과 타고난 운전 스킬까지 모두 갖춘 비앙키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주인공 같았다. 1989년 8월 3일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나 3살 무렵 카트로 모터스포츠에 입문한 뒤 2007년에는 프랑스 포뮬러 르노 2.0 클래스를 평정하기에 이른다. 2009년에는 포뮬러 3 유로 시리즈 챔피언에 올랐고 이후 GP2(현 F2) 시리즈와 포뮬러 르노 3.5 시리즈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페라리(2011)와 포스인디아(2012)에서 테스트 드라이버 역할을 맡게 된다.

쥴스 비앙키가 2014 모나코 그랑프리를 통해 F1 데뷔 후 첫 포인트를 기록하는 순간.
쥴스 비앙키가 2014 모나코 그랑프리를 통해 F1 데뷔 후 첫 포인트를 기록하는 순간.

꿈에 그리던 F1 입성은 2013년에 이루어졌다. 페라리 드라이버 아카데미 출신인 비앙키는 마루시아 팀에서 데뷔했다. 떡잎부터 달랐다. 하위 카테고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팀메이트인 맥스 칠튼을 압도하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다음해인 2014시즌 6라운드 모나코 그랑프리에서는 9위에 올라 F1 데뷔 후 첫 포인트(2p)를 획득한다. 비앙키에게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지만 소속팀인 마루시아 팀에도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2012년 창단해 2015년 해체한 마루시아 팀의 처음이자 마지막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팬 서비스 중인 쥴스 비앙키.
팬 서비스 중인 쥴스 비앙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비앙키는 15라운드 일본 그랑프리를 맞이하게 된다. 당사자 본인도 몰랐겠지만 팬을 비롯한 그 누구도 이 레이스가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글을 쓰는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사건이다. 2014시즌 일본 그랑프리 본선 레이스가 열린 10월 5일의 스즈카 서킷은 흠뻑 젖어있는 상태였다. 태풍 판폰의 영향으로 폭우와 강풍이 지속된 탓에 트랙 위에는 물웅덩이가 가득했다. 레이스를 펼치는 동안 드라이버의 시야는 많은 비와 선두 차량의 물보라로 인해 극도로 제한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레이스카 노즈에 새겨진 17번이라는 숫자가 눈에 띈다.
레이스카 노즈에 새겨진 17번이라는 숫자가 눈에 띈다.

당시 레이스 스케줄을 조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제기됐지만 국제자동차연맹(FIA)은 야속하게도 예정된 15시 정각 레이스를 진행시킨다. 꼭 그렇게 강행해야 했을까? 이날 레이스는 포메이션 랩 없이 세이프티카 상황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얼마 못 가 중단되고 만다. 케이터햄의 마커스 에릭슨이 미끄러운 노면으로 인해 스핀하며 그래블에 빠지기도 했고 루이스 해밀턴 등을 포함한 여러 선수도 제한된 시야에 불만을 표할 정도였다. 결국 레이스는 불과 2랩만에 중단됐다. 이때 일본 그랑프리가 완전히 취소됐다면 비앙키는 훗날 어떤 선수로 성장했을지….       

차에서 의식을 잃은 쥴스 비앙키와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아드리안 수틸.
차에서 의식을 잃은 쥴스 비앙키와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아드리안 수틸.

야속하게도 비는 그쳤다. 그로부터 레이스는 다시 재개됐고 42랩에서 운명의 활시위가 당겨졌다. 자우버 F1 팀의 아드리안 수틸이 던롭 커브라고 불리는 7번 턴에서 미끄러지며 장벽에 충돌하고 만 것이다. 이와 동시에 옐로우 플래그가 발동되고 마샬과 크레인은 수틸의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트랙 위로 들어섰다. 다행이 수틸은 부상없이 레이스카에서 빠져나왔다. 

문제는 비앙키가 44랩에서 수틸과 비슷한 형태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비앙키는 옐로우 플래그 상황으로 감속했지만 미끄러운 노면으로 인해 차량 제어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126km/h의 빠른 속도로 수틸의 레이스카를 견인하던 6.5톤의 크레인과 충돌하게 된다. 당시 비앙키의 레이스카는 크레인의 엔진 커버와 왼쪽 뒷바퀴 쪽을 들이받았는데 그와 동시에 롤 후프와 에어 인테이크가 찢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치게 된다. 

망연자실한 모습의 아드리안 수틸.
망연자실한 모습의 아드리안 수틸.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사고였다. 비앙키는 충돌과 동시에 의식을 잃었지만 다행히 마샬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고 이내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와 동시에 레이스도 종료됐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비앙키를 옮기는 과정에서 악천후로 인해 헬리콥터를 이용할 수 없었다. 차선책으로 구급차를 사용했지만 결국 병원 도착까지 37분이 더 소요됐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비앙키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즉 골든 타임을 놓쳤다는 의미다. 비앙키는 응급 수술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크레인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뇌의 신경 경로가 찢어지는 확산성 축삭 손상을 입은 것이 원인이었다. 

쥴스 비앙키를 구출 중인 모습.
쥴스 비앙키를 구출 중인 모습.

FIA는 사건 조사에 돌입했다. 그리고 4주 후 트랙 상태, 차량 속도 및 서킷 복구 차량 존재 등이 이번 사고의 복합 요인이라고 밝혔다. 이에 야간 레이스를 제외하고 일몰 또는 황혼 4시간 전에 레이스를 시작할 수 없도록 하는 조치를 시행하는가 하면 버추얼 세이프티카(VSC) 시스템 및 헤일로 도입 등을 계획하며 안전 규정을 대폭 손봤다. 아쉬운 점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었다는 것이다. 비앙키는 사고 직후 9개월 만에 생을 마감했다. F1 선수가 레이스 사고 여파로 세상을 떠난 것은 사망 시점을 기준으로 21년 만에 처음이었다.(1994시즌 산마리노 그랑프리 아일톤 세나)

나스 대성당에서 치러진 쥴스 비앙키의 장례식.
나스 대성당에서 치러진 쥴스 비앙키의 장례식.

많은 이들이 비앙키의 죽음을 애도했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올랑드는 “프랑스 모터스포츠 업계는 큰 희망 중 하나를 잃었다”고 말했고, 마루시아 팀 감독 존 부스는 “비앙키는 빛나는 재능으로 F1에서 위대한 일을 할 운명이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2009시즌 월드 챔피언 젠슨 버튼은 “우리는 훌륭한 사람이자 진정한 파이터를 잃었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고, 다니엘 리카르도는 “당신과 함께한 좋은 시간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샤를 르클레르(좌), 쥴스 비앙키(우).
샤를 르클레르(좌), 쥴스 비앙키(우).

비앙키가 끝내 이루지 못했던 ‘페라리 드라이버’라는 꿈은 본인을 롤 모델로 삼던 샤를 르클레어가 대신 실현했다. 비앙키는 르클레어의 형인 로렌조 르클레어와 친구였는데 이것이 인연이 돼 르클레어와도 친해졌다고 한다. 또한 르클레어는 비앙키의 아버지로부터 처음 카트를 경험하는가 하면 천주교 세례를 받을 때에는 증인으로 비앙키를 세웠다고 알려졌다. 비앙키가 르클레어의 대부로 불리는 이유다. 이 때문일까? 르클레어는 매년 비앙키의 기일에 맞춰 그를 그리워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난해에도 비앙키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게재했다. 지금까지 F1의 마지막 17번, 쥴스 비앙키 안타까운 스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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